귀녀(鬼女) 구레하(紅葉) 전설

에도 시대 풍속화가 도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이 표현한 모미지가리(紅葉狩).
출처 : 금석백귀습유(今昔百鬼拾遺, 일본어 위키)


 모미지(紅葉, 단풍) 전설은 고대 일본의 신슈 도가쿠시(信州戶隱), 기나사(鬼無里) 마을1) 벳쇼온천(別所溫泉)에 전해지는 귀녀(鬼女)2)에 관한 전설이다. 모미지는 주인공의 이름이며, 모미지 토벌의 칙명을 받은 무장 다이라노 고레모치(平維茂)3)가 모미지를 쓰러트린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937년, 아이즈(會津)4)에 아이가 생기지 않던 도모노 사사마루(伴笹丸)와 기쿠요(菊世) 부부가 살고 있었다. 둘은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5)에게 기원한 효험을 보았는지 여자아이를 얻어 구레하(吳葉)라고 이름을 지었다. 재색을 겸비한 구레하는 대농(大農) 집안의 자식과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레하는 비술(秘術)로 자신과 똑 닮은 미녀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대역으로 삼아 결혼시켰다. 가짜 구레하와 대농 집안의 자식은 얼마간 화목하게 지냈으나, 어느 날 가짜 구레하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고 당시 이미 구레하 가족은 도망을 쳤다.

 구레하 가족은 도성으로 상경했다. 여기서 구레하는 모미지(紅葉)6)로 이름을 바꾸고 처음에는 거문고를 가르쳤으나, 미노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7)의 부인의 눈에 띄어 시녀가 되었고 이윽고 지위가 높은 시녀인 ‘쓰보네(局)’가 되었다. 모미지는 쓰네모토의 아이를 갖지만, 이 시기에 쓰네모토 부인이 앓던 병의 원인이 모미지의 저주임을 히에이잔 산(比叡山)의 고승이 알아차린다. 이에 결국 구레하를 신슈 도가쿠시로 추방한다. 956년 가을, 문자 그대로 단풍(紅葉)의 시기에 모미지(紅葉)는 미나세(水無瀨, 기나사의 옛 이름)에 당도하였다.

 쓰네모토의 아이를 배고 도성의 문물에 정통하여, 게다가 미인인 모미지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역시나 도성의 생활이 그리웠다. 쓰네모토의 이름에서 기인하여 아들에게 쓰네와카마루(經若丸)라고 이름을 짓고, 마을 사람들 역시 마을 곳곳에 도성과 연관 지어 지명을 붙였다. 이러한 지명은 지금까지 기나사 마을에 남아있다.

 하지만 스스로 돌이켜 보면 도성의 광영과는 격이 다르다. 이로 인해 모미지의 마음은 차츰 황폐해지고, 도성으로 가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으고자 패거리를 이끌고 도가쿠시야마(戸隱山) 산(荒倉山아라쿠라야마 산)에 들어가 밤마다 다른 마을을 노략질하였다. 이 소문은 도가쿠시의 귀녀(鬼女)로 도성에까지 미쳤다.

 이에 다이라노 고레모치(平維茂)는 귀녀 토벌의 명을 받아 사사다이라(笹平)에 진을 치고 출격하였으나, 모미지의 요술에 가로막혀 고역을 치른다. 이리된 이상 신불(神佛)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여기어 관음보살에게 예를 올린 지 어느덧 17일째. 마침내 그의 꿈속에서 백발 노승으로부터 항마(降魔)의 검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귀녀를 쓰러트리겠노라 기세를 더하는 고레모치의 군세 앞에 그 대단한 모미지 역시 패하여, 고레모치가 휘두른 신검(神劍)의 일격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구레하(吳葉)=모미지(紅葉)의 나이 33세, 늦가을이었다.





1) 오늘날 나가노 현(長野縣), 나가노 시(長野市).
2) 문자 그대로 여자 귀신이라는 뜻인데, 일본어로 ‘기조(きじょ)’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처녀귀신’과 같은 맥락처럼 하나의 관용적 의미가 강하다.
3)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중기의 무장이다. 생몰년 불명. 다이라노 시게모리(平繁盛)의 아들인데 이 역시 생몰년이 불분명하다.
사료가 부정확한 이유는 이들이 헤이케(平家) 초기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친부인 시게모리의 경우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平將門の亂)’을 진압한 사료가 남아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레모치의 경우는 설화와 전설로 이름이 많이 거론된다.
하지만 가상인물이라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때 편찬된
존비분맥(尊卑分脈)이라는 일종의 족보집에는 분명히 그 이름이 등장한다.
4) 후쿠시마 현(福島縣) 서부의 지방명.
5)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마신(魔神)으로 육욕천(六慾天)의 정점인 제육천(第六天)의 주인이다.
6) 모미지와 구레하는 음은 다르나 뜻은 모두 ‘단풍’을 의미한다.
7) (?~961) 헤이안 중기의 귀족, 무장. 우리로 치면 본관에 해당하는 세이와겐지(淸和源氏)파의 시조이다.
아버지가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이며 어머니가 우대신(右大臣)을 지낸 미나모토노 요시아리(源能有)이다.




막부 말기~메이지 전기의 화가 쓰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가 표현한
모미지의 계략에 걸려 잠이 든 다이라노 고레모치(平維茂).
출처 : 우키요에(浮世繪) 모음집 신형삼십육괴선(新形三十六怪撰, 일본어 위키).


 윗글은 구레하 전설에 얽힌 일본어 위키의 줄거리만을 번역한 것이다. 본래 이 이야기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전통 연극인 '노(能)'의 모미지가리(紅葉狩)가 그 기본 형태이다.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 실제로는 다이라노 고레모치라는 영웅이 귀녀(鬼女)를 물리치기만 할 뿐인 평면적인 이야기이다. 실제로 위의 이야기만 하여도 훗날 이를 기초로 한 메이지 시대의 소설 줄거리이다. 물론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나가노 현 지방에 가면 이야기에 얽힌 비석이나 명소 등이 존재하지만, 그곳의 지방 풍습 등과 여러 살이 붙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연극 '노'에서는 그 이름을 '모미지가리(紅葉狩)'라고 하여, 여성의 이야기가 주가 된 앞의 이야기가 거의 통째로 생략된다. 또한 여성의 이름이 구레하니 모미지니 하는 것은 언급조차 없으며 '시녀(사실은 귀신)' 정도의 설정으로만 등장한다. 이 '모미지가리'란 '단풍놀이'라는 뜻인데, 연극 '노'에서는 몇 명의 젊은 미녀들이 단풍놀이를 나와 무장 다이라노 고레모치를 유혹하며 이를 물리치는 이야기로 묘사된다. 거기서 다이라노 고레모치는 위 그림처럼 앞의 소설 줄거리에서 말하는 '요술'이 아닌, 술과 여색에 빠져 잠이 든다. 이후 이야기는 앞의 소설 줄거리와 대동소이하다. 이처럼 사실은 지극히 평면적인 이야기이다.

 대개 이런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며, 혹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 마련인데, 위 소설 줄거리에서는 꿈에서 관음보살이 나왔다고 하지만 연극 '노'에서는 일본의 무신(武神)이자 전쟁의 신인 '하치만 신(八幡神)'이 나타난다. 일본 고유의 종교 아닌 종교인 신도(神道)가 대개 그러하듯 일본인들 입맛에 맞게 불교와 융합된 신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때 꿈속에서 받았다는 '항마의 검'이 바로 실존하는 일본도의 양식(혹은 전설의 검) '고가라스마루(小烏丸)'이다. 또한, 관계없는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게도 이 신은 위 이야기에 잠깐 나오는 세이와겐지(淸和源氏) 씨족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이것이 뭐가 재미있냐면, 정작 귀녀를 쓰러트린 다이라노 고레모치는 헤이케(平家) 가문인데 헤이케 가문과 겐지 가문은 무가 집안에서 오랜 라이벌, 나아가서 숙청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원수에게 그 신이 보물을 쥐여 준 격이랄까?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헤이케와 겐지의 초기 시절(헤이안 시대 초중기)이기 때문에 그런 양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흔히 일본 설화에서 '귀녀(鬼女)'라고 하면 대개는 이 구레하를 가리킨다.



덧글

  • 김진원 2015/06/02 07:08 # 답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
  • 3인칭관찰자 2015/06/02 21:04 # 답글

    헤이안조에서 특히 요괴라든가 그에 준하는 적을 토벌하는 에피소드가 많은 것 같네요.(슈텐도지 퇴치라든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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