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낳은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전설

막부 말기의 화가 쓰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가 표현한 구즈노하 전설(葛の葉きつね童子にわかるるの圖).
출처 : 우키요에(浮世繪) 모음집 신형삼십육괴선(新形三十六怪撰, 일본어 위키).


 옛날 옛날이었다. 무라카미(村上, 926~967년) 천황 때 셋슈(攝州 : 오사카 부大阪府 효고 현兵庫縣의 일부분)의 아베노쿄향(阿部野鄕)에 야스나(保名)란 이름을 가진 스물세 살의 청년이 살았다. 그의 아버지 아베노 야스아키(安部保明, 아베노 호로메라고도)는 이 지역의 영주였다. 아베 집안은 명문가로, 선조인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는 일찍이 나라 시대의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었다. 당나라 이름으로는 조형(晁衡 : 朝衡이라고도)이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玄宗) 아래서 좌보궐(左補闕), 산기상시(散騎常侍), 비서감(秘書監) 등의 직위를 역임했다. 당나라 문인인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등과의 우정도 돈독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야스나는 바로 그의 8대손이었다.

 그러나 아베 집안은 아버지 야스아키 대에 이르러 사기를 당해 모든 영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시 집안에는 천문(天文), 역법(曆法) 등 음양도의 신비를 기록하고 있는 천문학 비서(秘書)들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고, 아들인 야스나는 이러한 비서들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여태껏 그럴 틈이 없었다. 가문의 부흥이라는 숙원을 이루기 위해 야스나는 매달 센슈(泉州 : 오사카 부 남부)로 가서 묘진(明神)을 참배했다.

 신사는 시노다노모리(信太森 : 오사카 부 이즈미 시和泉市) 숲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곳은 칡넝쿨이 뒤엉켜 있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사방에는 여우들 천지였다.

 어느 해 가을 야스나는 시종 몇 명을 데리고 시노다노모리 숲에 참배를 하러 왔다. 주위의 자연경관에 감탄한 야스나는 신사 앞에 장막을 쳤다. 돗자리를 펼쳐 음식을 차려놓고 단풍을 감상하며, 시종들과 편하게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별안간 숲 쪽에서 개 짖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이지?”

 시종들은 모두 벌떡 일어섰다. 그때 흰 여우 두 마리가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여우들은 한쪽 입구에서 들어와 다른 쪽 입구로 달음박질치더니 이내 장막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따라 흰 새끼 여우가 뛰어들어왔는데, 지친 모양인지 놀랍게도 야스나 앞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방금 지나간 흰 여우 두 마리가 부모인 듯했다.

 “여우가 마침 사냥개에게 쫓기던 중이었나 보군. 가여운 것 같으니라고, 무서워 말아라, 무서워 마.”

 야스나가 새끼 여우를 자신의 긴 소매 안에 숨기자 곧이어 사냥개 몇 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뛰어들었다. 시종 중 하나가 바로 칼을 빼들어 그중 한 놈의 목을 베어 버리자 나머지 개들은 두려워 꽁무니를 빼더니,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을 에워싼 채 끊임없이 짖어 댔다. 얼마 후 한 무리의 무사들이 몰려왔다.

 “여우가 이리로 도망 왔지? 어서 여우를 내놓거라!”
 “이곳은 묘진의 경내이니, 살생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소.”
 “뭣이라?”

 무사 중 하나가 긴 칼을 빼들고 야스나를 베려 하자 야스나 역시 긴 칼을 빼들고 맞섰다. 이때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네놈들이 감히 우리가 쫓던 여우를 빼돌릴 셈이냐? 내 부하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기만 해봐라! 여봐라, 저놈들을 어서 처치해라!”

 그 사람은 바로 가와치(河内 : 오사카 동남부)의 슈고다이묘 이시카와 쓰네히라(石川恒平)였다. 그는 이시카와 군(石川郡)에 살면서 나쁜 짓을 일삼아 그곳의 인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아내가 고열에 시달리자 새끼 여우의 생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풍문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왔던 것이다.

양쪽에서 칼날이 어지러이 부딪쳤다. 야스나의 시종들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당해 낼 재간이 없어 하나둘 낙엽처럼 쓰러졌다. 급기야 야스나마저 부상을 입고 결국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무사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그를 밧줄로 꽁꽁 묶어 버렸다.

 “저놈의 목을 베어라!”

 쓰네히라가 의기양양하여 명령을 내렸다.
 야스나는 속으로 새끼 여우가 걱정되어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여우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무사 중 하나가 긴 칼을 높게 치켜들고 막 휘두르려는 찰나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무리들이 뒤돌아보니 한 스님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쓰네히라 일족 중 불교에 귀의하여 가와치 국(河内國) 등정사(藤井寺)의 주지가 된 요리노리(賴範) 스님이었다. 쓰네히라는 깜짝 놀랐다.

 “주지 스님,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신성한 경내에서 살생을 하시다니오. 우선 칼을 거두시고 노납(老衲 : 노승이 자신을 낮추어 이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시지요.”

 쓰네히라는 이러쿵저러쿵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주지로부터 한차례 훈계를 들은 쓰네히라는 결국 야스나를 주지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했다. 주지는 쓰네히라 일행이 떠난 것을 확인한 후 밧줄에 묶여 있는 야스나를 풀어 주며 말했다.

 “사실 저는 당신이 방금 구해줬던 그 흰 여우랍니다.”

 말을 마치자 다시 새끼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몸을 돌려 숲으로 달려갔다.
 야스나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아베노쿄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막 격전을 치른 탓에 목이 너무 말랐던 야스나는 이러저리 냇물을 찾았다. 그가 냇가에 이르렀을 때 젊은 아가씨 하나가 물을 긷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어깨에 지게 막대기를 메고 있었는데, 막대기에 매달린 물통으로 물을 뜨려다가 그만 미끄러져 냇물에 빠지고 말았다. 야스나는 자신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아가씨를 부축해 주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감사의 뜻을 전한 후 야스나의 상처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산 뒤쪽의 암자에 머물고 있으니 저를 따라오세요. 상처를 치료하고 우선 푹 쉬도록 하세요.”

 원래 야스나는 정신만 좀 차린 후 곧장 떠날 생각이었으나, 아가씨가 너무나도 정성스레 보살펴 주는 터라 하루만, 또 하루만 하며 지체하다가 결국 그 암자에서 아가씨와 7년을 살게 되었고, 슬하에 아베노 도지(安部童子)라는 자식까지 두게 되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또 다시 어느 해 가을(야스나와 아가씨가 만난 날)이 되었다. 야스나는 이미 완전히 그 지방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야스나가 밭을 갈러 나간 동안 아내는 집에서 열심히 베를 짜고 있었다. 집 정원에는 야스나가 정성스레 가꾼 국화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국화향을 맡자 아내는 정신이 그만 아득해졌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아내는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느꼈다.

 “아악, 너무 무서워요!”

 정신을 차린 아내는 놀라 울고 있는 도지를 보고 그제야 자기가 국화향에 미혹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래의 여우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는 후회하며 암자 방문 창호지 위에 와카(和歌) 한 수를 남겼다.

 “제가 생각나실 때는 이즈미의 시노다노모리 숲에 와서 구즈노하(葛葉)를 찾으세요.”

 그리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어머니를 잃게 된 도지는 더욱 상심해 큰 소리로 울었다. 집에 돌아와 와카를 본 야스나는 도지를 업고 시노다노모리 숲으로 향했다. 마침내 아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저는 본래 시노다노모리 숲에 살던 여우랍니다. 7년 전, 당신이 저를 구해주셨고, 그 은혜를 갚고자 부부의 연을 맺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저의 진짜 모습을 들킨 지금, 더 이상 두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저를 대신해 당신이 아이를 잘 보살펴 주세요.”

 말을 마친 아내는 도지에게 지혜옥(智慧玉) 한 알을 주고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 도지가 바로 그 유명한 음양사(陰陽師), 아베노 세이메이(安部晴明)이다.


-모로 미야(茂呂美耶) 글.



덧글

  • 잠꾸러기 2016/01/07 00:46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여우도 고대에 영물 이미지였군요. 아무 동물이나 주인공이 될순 없으니...
  • 조훈 2016/01/07 01:00 #

    과거에도 번역한 이야기인데, '세이메이의 어미는 여우'라는 틀만 아시면 될 듯 싶습니다.
    인물이 바뀌거나 시대가 바뀌는 등 배리에이션이 셀 수도없이 많네요.
  • 3인칭관찰자 2016/01/07 06:42 # 답글

    같은 여우라도 타마모노마에 구미호랑은 성격상 많이 대조되는 세이메이의 어머니로군요.
  • 조훈 2016/01/07 21:20 #

    별 생각 없이 첨부한 그림을 봤는데, 그림자로 비춰지는 여우 실루엣은 엄청 못되게 보이네요;
  • just me 2016/03/11 16:18 # 답글

    여우의 아들이라 불리는 이유에 이런 설화가 있었군요!
  • 조훈 2016/03/11 16:54 #

    네, 이런 이야기가 몇 번이나 각색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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